트럼프 대통령이 수천명이 환호하는 선거유세에서 ‘코로나바이러스’란 단어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지난 1월말이었다. 중국의 문제로 치부하며 미국에선 “모든 게 다 아주 잘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2월 흑인 지도자들과의 백악관 미팅에선 바이러스가 “어느 날 기적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한 달여, 전 세계 사망자가 4,300명에 달하고 미국 내 확진자가 1,000명을 넘어서는 동안 대통령의 어조도 변했다. 이번 주 들어 “세계를 기습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임을 인정한 그는 “예기치 못한 사태다. 모두가 바짝 경계하며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침착하라”면서 평소의 자화자찬을 뺀 다소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낙관했던 바이러스가 재선에 걸림돌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대통령의 메시지 진화라고 USA투데이는 분석했다. 미 공중보건에 비상등이 켜지자 백악관이 대통령의 무절제한 발언 해명에 진땀을 흘리고 증시가 폭락하면서, 유아독존 트럼프도 모든 게 불확실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이 얼마나 중대한 ‘위기’인가를 실감하는 듯 보인다.
지난 반세기 미국의 역대 대통령 대부분은 중대위기에 직면했었다. 케네디의 쿠바 미사일 위기, 존슨의 베트남전, 카터의 이란인질 사태, 아버지 부시 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아들 부시 때 9.11 테러와 태풍 카트리나, 오바마의 세계 금융위기 등이 대표적이다.
소련과의 합의로 핵전쟁을 피한 케네디, 대규모 국제연합군으로 사담 후세인을 쿠웨이트에서 축출한 아버지 부시, 대테러 전쟁으로 알카에다 척결에 나선 아들 부시, 금융위기를 무난히 헤쳐 나온 오바마 등은 위기 대처에 성공한 경우다.
그러나 존슨은 베트남전 실패로 재선출마 자체를 포기했고 카터의 인질구출작전 실패는 불황과 함께 그의 재선 패배 요인이 되었으며 아들 부시의 집권 2기 침몰 요인의 하나는 수천명 사망·실종자를 낸 태풍 카트리나에 대한 정부의 늑장·부실대응이었다.
“지금까지 트럼프는 운이 좋았다. 취임 후 3년간 그에겐 중대한 위기가 없었다”고 CNN 기고를 통해 전제한 국가안보전문가 피터 버겐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는 트럼프의 위기대처 능력에 우려를 표했다. 이슈에 대해 전혀 공부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팩트나 과학적 근거보다는 자신의 직감을 믿는 특성과 수많은 허위주장으로 신뢰를 잃은데 더해 짐 매티스 국방장관 등 유능한 참모들이 떠난 자리가 예스맨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근거 없이 낙관적인 대통령과, 정확한 사실보고 및 신속한 대처가 의무인 보건당국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상황인식과 대응 수위를 놓고 엇갈리면서 행정부의 난맥상이 드러나자 미디어들의 공격이 잇달았다 : ‘트럼프의 카트리나’ ‘트럼프 최악의 악몽’ ‘트럼프의 체르노빌’…발생초기 늑장·부실 대응에 대한 이런 비판의 설득력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최대 적수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동안 다양한 적들을 굴복시켜온 트럼프 특유의 어떤 무기로도 제압당하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가 위협하거나 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트럼프의 평상시 정략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월터 미드 바드 칼리지 교수는 지적한다. 다른 뉴스를 만들어 덮을 수도 없고, 오바마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백악관 내부인사들도 트럼프가 ‘코로나 위기’를 인정하며 메시지를 바꾼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윗으로 날려 보낼 수도, 드론으로 격추시킬 수도, 공화당 단합으로 극복할 수도, 대규모 선거유세로 압도할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킬러’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 지 확신이 서지 않는 듯 보인다”고 뉴욕타임스도 대통령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실체를 알 수 없으니 코로나 위기가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위기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는 확실하다. 투명하게 상황을 공개하고,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대처로 안정감을 심어주는 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정직하게 사실을 알리면서도 신중하게 패닉을 막아야 하는 위기 시 대통령의 역할이 격렬한 언사와 다툼을 즐기는 트럼프의 즉흥적 스타일과 맞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 보건 측면에서도, 자신의 재선 측면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대통령은 낙관론을 완전 버리진 못했지만 적극 대처에 나섰다. 매일 열리는 코로나 전담팀의 브리핑에도 자주 참석하고, 수천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추진하는 등 바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미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전담팀의 전염병 전문가 앤서니 파우치박사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나도 유감이지만 모든 미국인들이 감염에 심각하게 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사태악화는 계속될 것이며 안전지대는 없다는 뜻이다.
충격 완화 위한 경제 지원과 캠페인 효과를 동시에 노리는 트럼프의 노골적 전략에 민주당과 반트럼프 진영의 비판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미국인의 생명과 모든 미국인의 안녕이 걸린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미국의 대통령이 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일보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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